서아프리카의 옛 시장에서는 양끝이 벌어진 팔찌 모양의 구리·황동 고리가 돈으로 오갔다. 마닐라(manilla)라고 불린 이 금속은 장신구처럼 보이지만 여러 지역에서 거래단위와 재산의 형태로 사용됐다.
마닐라의 역사는 지역화폐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유럽의 금속생산, 대서양 노예무역, 팜유 교역, 식민지 통화개혁이 한 물건 안에서 만나는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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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는 왜 알아보기 쉬운 고리 형태였을까
마닐라는 완전히 닫힌 팔찌가 아니라 말발굽처럼 양끝이 열린 고리 형태가 많다. 구리와 황동은 장식품과 의례용 물건, 금속공예 재료로도 쓰였다.
여러 개를 묶어 운반하고 세기도 비교적 쉬웠으며 필요하면 금속을 다시 녹여 다른 물건의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베닌의 금속공예에서는 유럽에서 들어온 구리계 금속이 중요한 재료원이 됐다는 박물관 설명도 남아 있다.
같은 마닐라라도 가치가 달랐던 이유
‘마닐라’는 하나의 완전히 통일된 규격을 뜻하지 않는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무게와 크기, 금속배합, 끝부분의 모양이 다른 유형들이 존재했다.
1948~1949년 나이지리아 회수과정에서는 유형별 교환비율도 달랐다. 공식 기록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비율은 다음과 같다.
| 마닐라 유형 | 1파운드와 교환된 수량 |
| 오크포호 계열 | 80개 |
| 오콤보 | 240개 |
| 아비 | 480개 |
현대 동전처럼 하나의 규격으로 통일된 화폐가 아니었기에 같은 ‘마닐라’라는 이름 안에서도 교환비율이 크게 달랐다.
지역사람들은 모양과 크기, 무게로 서로 다른 유형을 구분했고, 그 관습은 공식 회수정책의 환율에도 반영됐다. 식민정부가 마닐라를 없애려면 먼저 현지에서 이미 사용하던 가치체계를 공식 통화 단위로 옮겨야 했다.
유형과 지역에 따라 값이 달라 “마닐라 한 개는 얼마”라는 단일 환율로 설명하기 어렵다. 지역사람들이 어느 종류를 어떻게 구분했는지가 실제 가치계산에 중요했다.
유럽에서 만든 금속이 서아프리카 화폐가 되다
마닐라는 서아프리카 내부에서만 만들어지고 사용된 물건이 아니었고, 대서양 교역이 확대되면서 유럽에서도 현지 시장에 맞는 마닐라를 대량생산했다.
19세기 영국 버밍엄은 이런 황동제품의 생산지 가운데 하나였다.

유럽 공장에서 만들었다고 해서 그 가치까지 유럽에서 자동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크기와 재질을 현지 시장이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생산자 역시 서아프리카의 교역관습을 의식해야 했다.
노예무역과 팜유 교역에서 마닐라는 어떻게 쓰였을까
마닐라의 역사는 대서양 노예무역과 분리하기 어렵다. 대영박물관은 노예무역기에 마닐라가 사람을 사고파는 거래에서 사용된 지급수단이었다고 설명한다.
이 사실을 다룰 때 마닐라를 ‘노예화폐’ 하나로만 규정하는 것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마닐라는 노예무역 이전과 이후에도 지역의 재산·교환수단으로 다양한 용도를 가졌고, 팜유와 다른 상품거래에도 사용됐다.
다만 대서양 노예무역에서 실제 지급수단으로 쓰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빠뜨릴 수 없다. 지역경제의 일상과 폭력적인 국제교역이 같은 화폐를 통해 연결됐다는 복합성이 이 주제를 어렵게 만든다.
노예무역이 끝난 뒤에도 마닐라는 즉시 사라지지 않았다. 남동부 나이지리아의 지역시장에서는 이후에도 오랫동안 화폐로 남았고, 팜유를 비롯한 상품교역에도 사용됐다.
하나의 화폐가 지역주민에게는 익숙한 재산·거래 단위이고 동시에 대서양 노예무역이 함께 얽힌 만큼, 마닐라의 역사는 단순한 ‘특이한 돈’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1948~1949년 대규모 회수는 왜 필요했을까
식민정부가 영국식 주화와 지폐 중심의 통화체계를 확대해도 오랫동안 가격을 계산해 온 단위였던 마닐라는 행정명령만으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948년 10월 대규모 회수가 시작됐고 1949년 3월 말까지 이어졌다. 나이지리아 입법회의 기록에는 약 3,250만 개의 마닐라가 회수됐다고 나온다.

회수작업에서 유형별 환율이 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닐라가 복잡한 지역규칙 위에서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1948~1949년 회수에서 오크포호 계열은 80개, 오콤보는 240개, 아비는 480개가 1파운드로 교환됐다. 식민정부조차 ‘마닐라 한 개’를 하나의 단위로 처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약 3,250만 개를 회수한 작업은 마닐라를 없애는 행정절차이면서, 동시에 수백 년 동안 지역시장에 쌓인 분류와 가격관습을 공식 통화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팔찌 모양의 금속보다 더 중요한 기록은 바로 그 서로 다른 교환비율에 남아 있다.
참고자료
The British Museum, Manilla Currency and the Benin Bronzes
Central Bank of Nigeria, History of Nigerian Currency
Nigeria Legislative Council Debates, 2 March 1950
Colonial Annual Report on Nigeria,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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