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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역사

호주 홀리 달러와 덤프, 은화 한 닢을 두 화폐로 바꾸다

by 가온킴 2026. 9. 13.

1813년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멀쩡한 스페인 은화의 가운데를 잘라냈다. 바깥쪽 고리 모양은 홀리 달러(Holey Dollar), 잘라낸 중앙 조각은 덤프(Dump)가 됐다. 동전 하나를 두 종류의 돈으로 바꾼 이유는 단순히 화폐 수를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식민지를 괴롭히던 주화 부족과 은화의 해외 유출을 함께 줄이기 위해서였다.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왜 동전이 자꾸 빠져나갔을까

19세기 초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영국 주화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 은화와 네덜란드 길더, 인도 루피 등 여러 외국 화폐가 함께 유통됐다.

영국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라 필요한 만큼의 주화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어려웠고, 어렵게 들어온 은화도 수입물품 대금을 치르면 다시 해외로 빠져나갔다.

1800년 필립 기들리 킹 총독은 여러 외국 주화의 현지 가치를 정해 거래 혼란을 줄이려 했지만, 국제적으로 널리 쓰이는 스페인 달러의 유출까지 막지는 못했다.

뉴사우스웨일스에서 스페인 달러의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은화라 식민지 안에서는 유용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져가도 그대로 가치가 있었다.

단순히 액면을 높게 정하는 것만으로는 이 은화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어려웠다. 맥쿼리는 동전의 형태 자체를 바꿔 국제적인 은화와 지역화폐를 분리하려 했다.

스페인 은화 4만 개가 도착했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1812년 11월 인도 마드라스에서 출발한 사마랑(Samarang)호가 스페인 8레알 은화 4만 개를 시드니로 가져왔다.

국제무역에서 널리 통용되던 스페인 은화는 화폐 부족을 완화하기에 적합한 재료였다.

19세기 초 시드니 항구에 도착한 상자 속 스페인 8레알 은화와 이를 확인하는 식민지 관리들
1812년 스페인 8레알 은화 4만 개가 뉴사우스웨일스에 도착했지만, 식민지 정부는 은화가 다시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을 방법이 필요했다.



그대로 시장에 풀면 다시 외국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컸다. 라클런 맥쿼리 총독은 국제시장에서 익숙한 스페인 달러를 뉴사우스웨일스 안에서만 특별한 가치를 갖는 화폐로 바꾸려 했다.

홀리 달러와 덤프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은화의 중앙을 둥글게 잘라내자 바깥에는 구멍 난 고리 모양의 은화가 남았다. 이 바깥쪽에 ‘NEW SOUTH WALES 1813’과 새로운 표식을 넣어 5실링짜리 홀리 달러로 만들었다.

가운데 조각도 버리지 않았다. 별도 도장을 찍어 15펜스, 곧 1실링 3펜스짜리 덤프로 만들었다.

스페인 8레알 은화와 가운데가 뚫린 홀리 달러, 잘라낸 중앙 덤프를 나란히 보여주는 모습
스페인 은화의 중앙을 잘라 바깥 고리는 5실링 홀리 달러로, 가운데 조각은 15펜스 덤프로 다시 만들었다.



원래 하나였던 은화가 두 종류의 공식 화폐가 된 것이다. 가공된 두 조각은 원래 스페인 달러와 쉽게 구별됐고, 해외에서 바로 쓰기에는 불편해졌다.

윌리엄 헨셜은 왜 제작을 맡았을까

홀리 달러 제작을 맡은 인물은 윌리엄 헨셜(William Henshall)이었다.

그는 영국에서 위조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뉴사우스웨일스로 보내진 죄수였지만, 금속 세공과 주화 제작에 필요한 기술을 갖고 있었다.

정부는 헨셜에게 은화 중앙을 잘라내고 새로운 도장을 찍는 일을 맡겼다. 시드니의 작업장은 사실상 호주 최초의 조폐작업장 역할을 했다.

1813년 시드니 조폐 작업장에서 윌리엄 헨셜이 스페인 은화를 홀리 달러와 덤프로 가공하는 모습
금속가공 기술을 가진 윌리엄 헨셜은 스페인 은화의 중앙을 잘라 홀리 달러와 덤프로 가공하는 작업을 맡았다.



헨셜은 일부 홀리 달러의 장식에 자신의 성을 뜻하는 ‘H’를 남겼다. 위조 기술 때문에 식민지로 보내진 인물이 공식 화폐 제작에 참여했다는 대목도 이 화폐의 독특한 후일담이다.

5실링과 15펜스에 담긴 식민지의 계산

기존 스페인 달러 한 닢은 뉴사우스웨일스에서 5실링으로 평가됐다. 가공 뒤 바깥쪽 홀리 달러에는 그대로 5실링, 가운데 덤프에는 15펜스의 가치가 부여됐다.

결과적으로 한 닢에서 합계 6실링 3펜스의 화폐가 나왔다. 은의 총량은 늘지 않았지만 정부가 지역 안에서의 액면을 다시 설계했다.

원래 5실링으로 평가되던 스페인 달러에서 총 6실링 3펜스의 액면이 만들어졌으니 명목가치는 약 25% 높아졌다. 이 추가 가치는 식민지 안에서 사용할 때 의미가 있었고, 외부로 가져가 은으로 녹이거나 원래 국제은화로 거래하려 하면 같은 이점을 얻기 어려웠다.

구멍을 뚫은 독특한 모양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라 유출을 억제하는 경제적 장치였다. 화폐를 더 지역적으로 만들어 외부시장보다 식민지 안에서 보유하는 편이 유리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이 정책에는 두 효과가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화폐 단위가 늘었고, 원래 국제은화와 다른 모습과 가치가 생겨 외부로 가져갈 매력이 줄었다.

1820년대 영국 주화 공급이 개선되면서 홀리 달러와 덤프는 회수되기 시작했고, 1829년 공식 통용도 끝났다.

1813년의 가공은 은을 더 만들어내지 않았다. 대신 원래 5실링으로 평가되던 국제 은화를 5실링 홀리 달러와 15펜스 덤프로 나누고, 뉴사우스웨일스 안에서 더 높은 명목가치를 갖게 했다. 구멍 난 모양은 이 은화를 식민지 안에 붙잡아두려는 정책의 흔적이었다.

 

참고자료
National Museum of Australia, Holey dollar
State Library of New South Wales, Australia’s first unique coins: Holey dollar and the du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