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이 닫히고 적군이 도시를 에워싸면 식량과 무기뿐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오던 화폐까지 끊긴다. 그 와중에도 성 안에서는 병사에게 급료를 주고 식량과 물자를 사며 일상거래를 이어가야 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만든 임시 지급수단을 공성화폐(siege money)라고 부른다.
목차
포위된 도시에 왜 새로운 화폐가 필요했을까
공성전은 도시의 공급선을 차단해 버티기 어렵게 만드는 전술이었다. 외부 상인과 세금, 지원군을 통해 들어오던 주화도 줄어들었다.
수비군의 급료는 도시 방어를 지속하는 데 직접적인 문제였다. 정상 화폐가 바닥나도 병사와 시장의 지급을 멈출 수는 없었다.
미국화폐학회는 여러 공성화폐가 수비군 급료와 도시 내부거래를 유지하기 위해 발행됐다고 설명한다.
공성전이 길어질수록 평시의 화폐공급망은 끊기고, 도시 안에 남아 있는 금속과 물자를 다시 배분해야 했다. 병사에게 급료를 지급하지 못하면 방어체계가 흔들릴 수 있고, 상인이 물자를 내놓지 않으면 식량유통도 막힌다.
공성화폐는 전쟁의 주변적인 기념품이 아니라, 포위된 도시가 내부 경제를 계속 움직이기 위해 만든 행정수단이었다.
뉴어크에서는 은접시가 네모난 돈이 됐다
1640년대 영국 내전 때 왕당파 거점이었던 뉴어크(Newark)에서는 은접시와 은잔 같은 금속을 화폐재료로 사용했다.
뉴어크의 National Civil War Centre 자료와 남아 있는 공성주화를 보면 원래 은제품의 장식 흔적이 남은 사례도 확인된다.

금속을 녹여 완벽한 원형 주화를 대량생산하기보다 필요한 무게로 잘라 표식과 액면을 찍었다. 그 결과 사각형이나 마름모에 가까운 주화가 나타났다.
은이라는 재료 자체도 가치를 가졌지만 단순한 은조각과 공성주화는 달랐다. 공식 표식과 액면은 도시 안에서 얼마로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라이덴에서는 종이로 주화를 대신했다
귀금속조차 충분하지 않다면 재료를 바꿔야 했다.
1574년 네덜란드 독립전쟁 중 스페인군에게 포위된 라이덴(Leiden)에서는 종이로 만든 비상화폐가 등장했다.
Museum De Lakenhal에는 당시의 종이 공성화폐가 남아 있다. 두꺼운 종이에 도시 문장과 상징, 액면을 찍었고 20스투이버와 28스투이버 같은 종류가 보존돼 있다. 은으로 도금한 종이화폐 사례도 전한다.

뉴어크의 화폐는 은 자체의 금속가치가 컸지만 라이덴의 종이에는 액면만큼의 재료가치가 없었다. 같은 공성화폐라도 가치의 기반과 재료가 전혀 달랐다.
뉴어크에서는 은제품을 잘라 주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에도 금속 자체가 남는다. 반면 라이덴의 종이화폐는 도시가 그 액면을 인정한다는 제도적 보증에 더 크게 의존했다.
이 대비는 ‘화폐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그 가치를 인정했는가’를 보여준다. 두 도시는 같은 위기를 전혀 다른 자원조건으로 해결했다.
포위가 끝난 뒤 공성화폐는 어떻게 됐을까
공성화폐는 평상시까지 계속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화폐가 아니었다. 외부 공급이 회복되면 정상 주화와 교환되거나 역할을 잃었다.
도시 안에서 급료와 물건값으로 쓰이려면 포위가 끝난 뒤 어느 정도의 교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어야 했다. 은으로 만든 뉴어크 주화는 금속 자체의 가치가 있었지만, 라이덴의 종이화폐는 발행도시의 권위와 향후 처리 방식에 더 크게 의존했다.
일부 공성화폐는 전쟁 뒤 기념물로 남았다. 뉴어크 공성주화 가운데 구멍을 내 목에 걸었던 사례도 전한다. 전쟁 중에는 지급수단이었지만, 이후에는 포위전을 기억하는 물건으로 성격이 바뀐 것이다.
공성화폐의 공통점은 재료가 아니다. 정상적인 화폐 공급이 끊겨도 도시 내부의 지급은 계속돼야 했다는 문제다. 뉴어크의 은식기와 라이덴의 종이는 같은 위기에 전혀 다른 재료로 대응한 두 사례다.
참고자료
American Numismatic Association, Siege Coinage of the English Civil Wars
Newark Town Council, Town Hall Museum, 뉴어크 공성주화와 은제품 사용 사례
Museum De Lakenhal, Papieren noodmunt uit het beleg van Leiden, 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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