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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역사

독일 노트겔트의 역사, 도시가 만든 비상화폐

by 가온킴 2026. 9. 11.

독일 노트겔트(Notgeld)라고 하면 1923년 초인플레이션기에 찍힌 수백만·수십억 마르크 지폐가 먼저 떠오르기 쉽다. 노트겔트의 시작은 초인플레이션보다 앞선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사람들이 금속화폐를 보관하고 주화 유통이 줄면서 여러 지역에서 잔돈 부족이 나타났다. 도시와 지방자치단체, 기업은 일상의 지급을 이어가기 위해 자체 비상화폐를 발행했다. Notgeld는 말 그대로 ‘비상시의 돈’이라는 뜻이다.

1914년 노트겔트는 작은 액면의 빈자리를 메웠다

전쟁 초기에 문제가 된 것은 거대한 액면의 지폐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거래였다. 주화가 부족해지자 지방정부와 기업 등이 소액의 임시 지급수단을 만들었다.

발행범위는 지역적이었다. 독일 전체에 통용되는 하나의 새 국가화폐 대신 각 지역의 사정에 따라 서로 다른 노트겔트가 등장했다.

많은 노트겔트에 도시 이름과 발행기관이 직접 적힌 것도 지역적인 통용범위와 관련이 있다. 어느 지역에서 얼마로 받아줄지 명확해야 했다. 국가 지폐와 달리 전국적인 사용범위를 전제로 하지 않았으므로 발행자의 이름과 지역성이 화폐의 성격을 결정했다.

전쟁 초기에 금속을 전쟁물자와 산업에 우선 배분해야 했다는 사정도 소액주화 부족을 심화시켰다. 작은 동전 부족이 단순한 소비자의 불편을 넘어 지방행정과 기업이 직접 지급수단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로 번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초 독일 도시의 상점에서 소액 노트겔트로 거스름돈을 주고받는 모습
1914년 전쟁이 시작된 뒤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주화 부족을 메우기 위해 도시와 기업이 작은 액면의 비상화폐를 발행했다.

 


노트겔트라고 해서 모두 같은 법적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국가가 발행한 마르크 지폐와 달리 발행주체와 사용범위, 상환조건이 제각각이었다.

전후에는 수집용 노트겔트가 하나의 문화가 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노트겔트라는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화려한 그림과 지역 전설, 풍경을 담은 Serienscheine 같은 연속 발행물이 등장했다.

실제 거래 필요보다 기념성과 수집성이 커진 발행물도 생겼다.

지역 풍경과 삽화가 화려하게 인쇄된 독일 수집용 노트겔트 여러 장
전후 독일에서는 지역 풍경과 전설을 화려하게 담은 수집용 노트겔트가 늘어나면서 비상 지급수단과는 다른 성격을 보이기도 했다.

 

 

사용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된 수집용 노트겔트가 많은 것도 이 시기의 특징이다. 1914년의 실용적인 잔돈과는 목적이 달라졌다.

지역의 풍경과 전설, 역사적 인물을 화려하게 그린 발행물 가운데에는 실제 지급보다 ‘사고 싶은 지폐’를 만들려는 목적이 강한 것도 있었다. 수집가가 실제 액면보다 높은 가격에 지폐를 사면 발행자에게도 수입이 생겼다.

전후 수집용 노트겔트에는 비상화폐의 외형을 빌린 지역 홍보물·기념품의 성격까지 더해졌다. 한 이름 아래 실용적 지급수단과 수집상품이 함께 존재한 것이다.

1923년에는 액면 자체가 폭발적으로 커졌다

1923년 초인플레이션은 노트겔트의 모습을 다시 바꿨다. 물가가 빠르게 오르면서 중앙정부의 지폐 생산만으로 지급수요를 따라가기 어려웠고 지방정부와 기업까지 거대한 액면의 지급수단을 내놓았다.

수백만, 수십억 단위가 적힌 노트겔트는 처음 등장했던 1914년의 작은 잔돈과 목적도 경제환경도 달랐다.

1923년 독일의 고액 노트겔트와 급격히 오른 물가표를 함께 보여주는 장면
1923년 초인플레이션기에는 노트겔트의 액면이 수백만·수십억 단위로 커지며 1914년의 소액 비상화폐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같은 이름 아래 전혀 다른 종류의 화폐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노트겔트는 한 종류의 돈이 아니었다

노트겔트의 역사는 1914년 전쟁 초기, 전후 수집용 발행물, 1923년 초인플레이션이라는 서로 다른 단계를 거쳤다.

‘노트겔트=초인플레이션 지폐’라고만 설명하면 1914년의 주화부족과 전후 수집용 발행을 놓치게 된다.

어떤 노트겔트는 실제 잔돈 부족을 해결했고, 어떤 것은 수집가를 겨냥했으며, 어떤 것은 초인플레이션 속에서 급격히 커진 지급수요를 감당하려고 발행됐다.

같은 이름의 돈이 불과 몇 년 사이 전혀 다른 기능을 맡았다는 점이 노트겔트 역사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다.

실물을 볼 때도 발행연도와 발행기관을 함께 확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려한 그림이 있다고 모두 전후의 수집용 노트겔트인 것도 아니고, 큰 숫자가 적혀 있다고 모두 1923년 초인플레이션기에 발행된 노트겔트인 것도 아니다.

노트겔트는 한 장의 지폐 디자인보다 시기별 경제상황이 돈의 역할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비교할 때 더 가치 있는 자료다. 1914년의 잔돈, 전후의 수집품, 1923년의 초고액권을 나란히 보면 같은 이름 안에서 화폐 기능이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 선명해진다.

 

참고자료
Deutsche Bundesbank, 독일 Notgeld 및 1914~1923년 화폐 관련 자료
Deutsche Bundesbank, Geld und Geldpolitik